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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속의 자주외교

2차세계대전 기간중의 약소국들의 외교 및 군사 정책 비교 분석

I. 서론

최근 노무현 대통령의 LA 자주외교 발언과 이어진 한미정상회담 결과 발표 사이에 국내에서 벌어졌던 자주외교 논란을 보며 국내에 폭 넓은 스펙트럼의 외교적 관점이 일반 국민은 물론 국회의원과 언론사의 데스크 사이에 존재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일견 사대주의적인 관점에서부터 무모해 보이는 지나친 자주적 관점까지를 포함하는 다양함 속에서 일반 국민들은 여전히 상황을 객관적으로 평가할 만한 잣대를 찾기 어려워하는 듯합니다.

제법 오래 전부터 구상해 오던 글인데 2차세계대전 전후의 독일과 소련의 주변부에 있던 약소국들의 외교, 군사 정책을 분석해 보려고 합니다. 지정학적으로나 주변 강대국과의 국력의 차이로 보나, 우리와 비슷한 처지의 유럽의 약소국들이 외교적 군사적 격랑의 30년대 말과 40년대 초에, 생존을 위해 취한 외교적 결정이 향후 국가의 존망에 어떠한 결과를 초래했는가 하는 점을 되짚어 보는 것입니다. 현재의 우리나라의 외교적 스탠스를 어디에 놓는 것이 우리 민족에게 가장 유리한가 하는 판단의 좋은 자료가 될 줄로 믿습니다.

일단 핀란드(Finland), 루마니아(Romania), 스페인(Spain) 그리고 터키(Turkey)를 꼽아 보았습니다. 이 네 나라 모두 강대국과 국경을 맞대고 있고 상대적인 국력이 주변 강대국과 현격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는 점에서 우리나라와 유사한 면이 있습니다.

▲ 2차세계대전중의 유럽지도



II 본론

(1) 핀란드

핀란드는 소련의 북해로의 진출을 막고 있는 호리병의 병마개와 같은 위치에 있는 나라입니다. 인구는 500만명을 조금 넘고 국토면적 30여만 제곱킬로미터의 작은 나라입니다.

▲ 핀란드지도


핀란드는 독일의 소련 침공 2년 전(1939년), 소련으로부터 일부 영토의 할양을 요구 받습니다. 상식적으로 군사력의 차이가 너무 심해 소련의 요구를 들어주는 게 순리였겠지만 핀란드는 자주독립국임을 내세워 단호히 소련의 요구를 거부합니다.

이런 대담한 외교적 결단은 이 사건 직전에 있던 체코슬로바키아(Czechoslovakia)의 경우와 큰 대비를 이룹니다. 동유럽 국가 중 가장 산업화가 진전된 민주화된 공화국이었던 체코슬로바키아는 1938년의 뮌헨 조약(Munich Agreement)의 결과, 수데텐란트(Sudetenland) 지방을 병합하겠다는 독일의 요구에 별다른 저항 없이 굴복한 후, 1939년 3월 어이없게 나라 전체를 싸움 한번 없이 독일에게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죠. 이후 이차세계대전의 종결 후 수데텐란트에서 독일인들을 모두 내몰아내기는 했지만 점령군인 소련에게 루테니아(Ruthenia) 지방을 빼앗기고 60년대 말 프라하의 봄 기간을 제외하고는 1989년까지 소련의 압제에서 신음하게 됩니다.

핀란드의 자주적 결정에 소련은 상투적인 조작극을 핑계 삼아 23개 사단 45만명의 병력을 동원해 핀란드를 공격합니다(1939년 11월 30일: 겨울전쟁). 이 침략전쟁으로 소련은 그해 12월 14일 국제연맹으로부터 추방당하고 맙니다. 핀란드는 전 국민이 일치단결하여 (핀란드와 소련 양쪽에 모두 놀랍게도 그 당시 핀란드의 사회주의자들은 조국 수호를 위해 모두 전선으로 달려 나가 소련의 침략에 맞서 싸웁니다.) 비록 장비와 병력의 열세(16만명)에도 불구하고 만네르하임(Mannerheim) 장군의 영도 하에 격렬한 저항을 펼쳐 겨울전쟁 기간 동안 소련군으로부터 세계 전사 상 유래를 보기 드문 승리를 이끌어 내었습니다.

물론 날씨가 풀린 뒤 재개된 소련군의 공격으로 결국 1940년 3월 핀란드의 제2 도시인 비이푸리(Viipuri), 항구도시 항코(Hanko)와 라도가호수 주변의 전 지역 그리고 칼레리아(Karelia) 지협을 소련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이 맺어지죠.

하지만 겨울전쟁 기간 코가 석자가 되도록 혼쭐이 난 소련은 강화조약 후 핀란드의 비무장화라든가 하는 후속조처는 생각도 못하게 됩니다.

이때 소련의 침공에 이를 갈던 핀란드는 그 후 2년 뒤 독일의 소련 침공 시(1941년) 유일하게 독일군 측에 자발적으로 참전한 나라가 됩니다. 사실 웃긴 건 1939년 11월의 소련군의 핀란드 침공은 1939년 8월에 이루어진 독소비밀 조약(Molotov-Ribbentrop Pact)에서 핀란드를 소련의 영역으로 결정한 내용에 따른 결과인데 말입니다.

하여튼 핀란드군은 독소전의 개시 (1941년 6월)와 함께 지난 겨울전쟁 기간 중 빼앗겼던 자국의 영토를 탈환하기 위한 군사작전을 독일군과 함께 펼치게 됩니다.

다만 여기서 눈여겨 볼 내용은, 정작 핀란드군은 독일 측의 강권에도 불구하고 레닌그라드의 직접적인 봉쇄 작전에 참여하는 것은 거부합니다. 이유는 레닌그라드 진공을 포함한 소련 영내로의 깊숙한 진격이 겨울 전쟁 때 소련이 내세웠던 이유 중의 하나인 핀란드로부터의 레닌그라드 위협을 증명해 보이는 결과가 될 것을 두려워한 핀란드 수뇌부의 결정이었습니다.

간단히 말해 '실지회복을 위한 전쟁이지 영토적 야심을 채우기 위한 침략전쟁은 아니다' 이거죠.

이와 같은 자주적 조처가 나중에 전쟁의 방향타가 독일군에서 소련군으로 넘어가는 1944년에 위력을 발휘하게 됩니다. 1944년 6월 소련의 레닌그라드 전선군과 카렐리아 전선군의 압박으로 시작된 전선의 전면적인 붕괴가 핀란드로 하여금 전쟁에서 빠져 나올 방법을 찾기 시작하게 만듭니다. 핀란드에게는 독일과의 동맹이 '혈맹'이니 뭐니 하는 추상적인 개념이 아닌 자신의 이익에 바탕을 둔 계약과 같은 것이었습니다. 주변조건과 상황이 변하면 계약은 언제나 변경되거나 취소되는 것입니다.

결국 소련 지휘부는 다른 전선으로 자원을 전용하기 위해 핀란드가 독일과 동맹을 파기하는 것을 허용하여 핀란드와 1944년 9월 16일 휴전을 체결하게 됩니다. 이것은 1940년의 국경선을 회복하고 소련기지로서 항코(Hanko)를 폴카라(Porkhala)로 대신하고 핀란드에 3억 달러에 달하는 배상금을 부과하는 조건이었습니다.

결국 전쟁 초기에 독일의 요구에도 불구하고 원래의 자국 영토 밖으로 진격을 삼간 핀란드의 자주적 결정은 독일의 동부 협력자 중 홀로 소련의 점령으로부터 자신을 지켜내어 독립국으로 전쟁에서 살아남아 서구 민주사회체제를 존속하게 되는 계기가 된 것입니다.

친구 따라 강남 가는 것이 아니고 주관을 갖고 자국의 이익에 충실한 결과입니다.

(2) 루마니아

말도 많고 문제도 많은 발칸반도의 거의 한가운데 있는 루마니아도 핀란드와 사정이 비슷한데, 핀란드보다는 좀더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었습니다.

1940년 6월에 들어 루마니아는 소련으로부터는 베살라비아(Bessarabia) 지역과 북부 부코비나(northern Bukovina)를 점령당하고 8월 30일에는 헝가리에게 트란실바니아(Transylvania: 드라큘라로 유명한 동네죠)의 1/3을 강제로 양보하게 되고 9월 7일에는 불가리아에게 남부 도브루댜(southern Dobrudja)를 강제로 내어주게 됩니다.

같은 약소국 입장에서 보더라도 참 난감한 느낌을 줍니다. 이때 상실한 면적이 4만2000 제곱킬로미터에 이 지역에 딸린 인구만 240만 명입니다. 우리 남한 면적이 9만8000제곱킬로미터니까, 우리 전체 면적의 거의 반에 가까운 국토를 2~3달만에 주변국들에게 빼앗긴 셈입니다.

당연히 나라가 난리가 났고 이어진 군사 쿠데다로 이안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장군이 권력을 잡게 됩니다. 그런데 핀란드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대규모 영토의 상실이 사실은 독일의 중재와 강권에 의해 일어났는데도 불구하고 안토네스쿠 장군은 독일에게 자국의 영토를 보호해 달라는 요청을 합니다.

이때부터 루마니아의 독일을 향한 외교적 과잉충성이 시작됩니다. 1940년 8월에 독일에게 잘 보이려고 영국과의 관계를 단절하려는 시도가 루마니아 유전에 대한 영국군의 폭격을 우려한 독일의 설득으로 중단되었고요. 이런 식의 종주국에 대한 과도한 충성이 오히려 종주국의 국익과 배치되는 웃지 못할 경우를 아직도 우리나라의 일부 보수 신문들의 논조와 미국무부간의 갈등으로부터 종종 보게 됩니다. 1940년 10월에는 루마니아의 요청으로 첫 독일군부대가 루마니아에 주둔을 시작하게 됩니다.

1940년 10월28일에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공해 갑자기 발칸의 정세가 급물살을 타기 시작하자 안토네스쿠는 또 다시 외교적 과잉조처를 시작해 히틀러에게 독일군 기갑사단을 자국 내에 주둔시켜 줄 것을 요청하고 루마니아 자신도 39개 사단을 새로 편성할 테니 도와달라고 부탁합니다.

주변국인 불가리아와 헝가리의 경우 독일의 군사적 위압에도 비교적 페이스를 잃지 않은 반면 루마니아의 경우 그 해 여름의 영토 상실을 감안한다 하더라도 독일에 대한 구애가 도를 넘어섰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결국 이와 같은 루마니아의 자주외교와 자주국방에 대한 비전 상실은 이후 독소전 전 기간 중 독일 동맹국 중 최다 병력을 투입하여 (독일을 제외한 전체 추축국 군대를 다 합친 것보다 더 많은 군대를 동원했습니다.) 독소전 내내 독일군과 함께 싸우게 되는 계기가 됩니다. 오데사(Odessa), 세바스토폴(Sevastopol), 스탈린그라드(Stalingrad)로 이어지는 루마니아군의 활약상은 과히 나쁘지는 않았고 또 루마니아군의 용맹성은 나름대로 평가를 받았지만 루마니아 젊은이들이 러시아 땅에서 흘린 피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생각하면 남의 일 같지 않아 마음이 착잡합니다.)

이런 루마니아의 과도한 독일 지원은 군사 부분을 넘어 경제적 무상 지원에까지 이릅니다. 루마니아의 플로이에스티(Ploiesti) 유전에서 생산되는 석유는 물론, 곡물을 비롯한 각종 산업자원을 대가없이 독일에게 지원한 결과 루마니아 국내의 인플레이션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이후 공세의 주도권이 소련으로 넘어간 후 1944년 루마니아는 소련의 침공을 받게 됩니다. 물론 1944년 8월 루마니아의 왕 미하이 (King Mihai)가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안토네스쿠 장군은 실각하게 되고 이어 루마니아는 연합국 측에 가담해 거꾸로 독일군과 싸우게 됩니다.

하지만 1947년의 파리조약에서 연합국은 루마니아를 승전국의 일원으로 인정하지 않는다는 결정을 내려 결국 소련과 불가리아에게 일부 영토를 빼앗기는 수모를 당하게 됩니다.


▲ 이차세계대전후 루마니아 지도



독일 측에 적극적으로 가담한 루마니아는 자국군만 50만명의 희생을 치렀고 민간인 사망자도 50만 명을 헤아리게 됩니다. 전사자와 민간인 희생자수는 자료마다 차이가 심하지만 대충 이 정도 됩니다. 물론 연합국의 표적이 되어 국내자원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플로이에스티 유전도 폭격으로 파괴되는 등 국내 산업기반도 크게 파괴되었고요. 그리고 2차 세계대전 이후에는 소련의 위성국으로 주권을 잃은 채 혹독한 압제의 시간을 보내야만 했습니다.

수십년이 지난 한반도에 살고 있는 제게도 그때 왜 안토네스쿠 장군은 그렇게 심한 친독일적 정책으로 나라를 망쳤을까 하는 의문이 떨쳐지지가 않습니다. 다만 추측해 보자면 지난번 이라크 파병 논란시 "파병시 미국에게 요구조건을 내거는 것은 거지 근성이다" "미국을 감동시켜야 한다"고 했던 송영선 전 한국국방연구원 안보전략연구센터 소장(현 한나당 국회의원)이나 이번 노대통령의 해외 순방시 "부시에게 대들까봐 걱정이다"라고 한 김덕룡 의원과 비슷한 사고가 아니었을까 생각해 봅니다.

뭐 별도로 부가 설명을 드리지 않아도 자주적 결정이 없는 외교적, 군사적 정책이 어떤 재앙을 불러 들였는지는 불을 보듯이 분명합니다.

하지만, 이 와중에도, 즉 자국의 영토가 대량으로 상실되어 국가의 존립마저 위험해 독일에 달라붙은 루마니아조차 대전기간 내내 자국군의 지휘권만은 독일군에게 넘기지 않았습니다. 이는 핀란드군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아직도 국군의 전시작전권이 미군에 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들은 역사 공부를 더 하기를 권해 드립니다.

(3) 스페인

2차 세계대전 직전의 스페인도 나라꼴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스페인 내전 기간(1936-1939)중 국내의 산업기반이 모조리 파괴된 건 말할 것도 없고 양측의 인명 피해도 극심해 (50만 -100만명 정도로 추산됩니다) 국력의 후퇴가 막심했습니다. 내전은 프랑코장군(Francisco Franco)이 이끄는 파시스트 독재정권의 승리로 끝났습니다.

▲ 스페인의 프랑코 총독 사진


내전 기간 중 이탈리아와 독일은 프랑코 장군 측에 병력파견(콘돌여단)과 무기제공을 비롯한 막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고 소련도 공화국군 측에 1000대의 항공기, 900대의 탱크, 1500문의 대포와 3만 톤 규모의 탄약 등을 제공했습니다. 물론 소련의 경우 이 모든 군사적 지원에 5억 달러어치의 금괴를 대가로 받아냈습니다. (이에 대해서는 국제적으로 논란도 많습니다. 스페인이 과거 잘나갈 때 모아 놓은 금의 2/3가 이때 소련으로 유출됩니다.)

6.25와 월남전 그리고 최근의 두 차례의 이라크 전에서와 마찬가지로 내전중의 스페인은 각국의 무기 경연장이 되었고 각 강대국은 자국이 새로 개발한 무기의 성능을 시험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삼았죠.

내전 기간 중의 내용은 본 글과 상관이 많지 않으니 이 정도로 언급을 마치고 이후 프랑코 장군이 이끄는 스페인의 외교적 군사적, 노선을 살펴보겠습니다.

1940년 어찌 보면 싱거우리만큼 허무한 프랑스의 패배 이후 (4월 9일에 폴란드가 최종적으로 항복하고 5월 10일에 서부전선에서 총공격 이 시작된 지 한 달만인 6월 22일에 프랑스가 항복을 했으니 정말이지 대단하긴 대단한 전격전이죠) 히틀러는 이미 7월에 프랑코의 스페인이 독일군의 스페인 영내 통과를 허락할 것이라는 전제하에 영국군의 지배하에 있는 지브랄터(Gibraltar) 점령계획을 세울 것을 지시합니다.

지중해로 들어가는 길목인 지브랄터가 독일의 수중에 들어오면 영국의 북아프리카와 발칸에서의 힘은 급격히 상실될 테니까요. 히틀러로서는 프랑코의 집권에 결정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은 후원자이자 그 당시 유럽 대륙의 절대적인 패권을 쥐고 있는 자신의 요구를 프랑코가 당연히 받아들이리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습니다.

그런데 1940년 12월 프랑코는 히틀러의 스페인 영내 통과를 통한 지브랄터 공략 계획을 공식적으로 거부해 버립니다. 사실 이 거부선언 두 달 전(1940년 10월 23일) 프랑코와 히틀러는 프랑스의 스페인 인접 남부해안도시인 헨다예(Hendaye)에서 만나 스페인의 추축국 참가에 관한 회담을 가졌습니다. 나중에 히틀러의 회고담에도 나오지만 이때 히틀러는 프랑코를 설득해 스페인이 추축국의 일원이 되도록 설득하느니 차라리 자기 이빨을 2-3개 뽑아 버리는 게 낫겠다고 할 정도로 프랑코는 자국의 이익을 보호하는 데 있어, 지금의 부시와는 비교할 수도 없는 절대적인 파워를 갖고 있던 당시의 유럽의 지배자에 맞서 한발자국도 뒤로 물러서지 않는 당당한 자세를 견지합니다.

정말이지 대단한 배짱이었습니다. 그의 진보세력에 대한 무자비한 탄압과 독재자로서의 악행을 희석할 의도는 전혀 없지만 어쨌든 한 나라의 지도자로서 자질은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국의 석유와 각종 곡물 산업자원을 무상으로 퍼준 루마니아의 안토네스쿠 장군과는 달리 스페인의 프랑코는 독일의 스페인 내의 광산 채굴권 요구까지도 거부해 버립니다. 하지만 전쟁기간 중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표명하긴 했어도 독소전중 자발적인 전투병력(Blue Division: 청색사단)을 파병하기도 하고 독일 선박에 각종 시설 사용을 허용하기도 하는 등 친독일적인 중립을 지킵니다.

물론 전쟁이 끝나고 얼마 동안은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따돌림을 당했지만 냉전 기간 중 스페인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에 곧 스페인은 통상부분은 물론이고 군사 부분에 있어서도 미국과 동맹관계를 체결하게 됩니다. 1953년 미국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스페인방문과 1955년 유엔 가입으로 전 후 재편된 국제사회의 완벽한 일원이 됩니다.

1940년 가을과 겨울에 보인 스페인의 자주적 외교 군사 정책은 지금의 노무현 대통령의 자주외교 선언 환경과 비교했을 때, 100배는 더 어려운 환경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습니다. 2004년도 현재의 한국과 미국의 국력차이나 주변 외교환경은 1940년의 프랑코 스페인과 히틀러 독일과의 관계와는 비교도 할 수 없게 양호한 조건입니다.

어째든 스페인은 프랑코의 자주적인 결정 덕에 세계대전 기간 중 중립국으로서의 수많은 경제적 혜택, 즉 독일이 해외로부터 수입할 수 없는 많은 전략 물자들을 중계무역 형태로 외국으로부터 수입해 독일에 재수출하는 과정에서 많은 국부를 쌓을 수 있었고 내전 기간 중 피폐해진 국내 경제 재건에 국력을 집중할 수 있었습니다.

참고로 미 국무성에서 지원한 연구 중에 「Preliminary Study on U.S. and Allied Efforts To Recover and Restore Gold and Other Assets Stolen or Hidden by Germany During World War II」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차세계대전 중에 독일에 의해 점령국으로부터 약탈되고 숨겨진 금을 회수하려는 연합국의 노력에 대한 보고서지요. 이 보고서의 보조자료 중에 독일이 중립국에게 지불한 금에 관한

"U.S. and Allied Wartime and Postwar Relations and Negotiations With Argentina, Portugal, Spain, Sweden, and Turkey on Looted Gold and German External Assets and U.S. Concerns About the Fate of the Wartime Ustasha Treasury"

라는 글이 있습니다. 이 글에서 스페인이 얼마나 많은 이익을 중립국의 지위를 통해 독일로부터 얻었는가에 대해 자세히 나와 있습니다.

(4) 터키

터키도 스페인만큼이나 2차세계대전 기간 중 고집스러운 중립외교로 짭짤한 실익을 거둘 수 있었습니다. 대전 기간 중 독일과 영미간의 줄타기 외교를 통해 터키의 외환보유고는 대전 전의 3700만불에서 대전 후 2억9천2백만불로 증가했고, 터키중앙은행의 금보유고 역시 국내에 77톤, 미국과 캐나다에 136톤 등 터키는 비약적인 국부의 증가를 맛보게 됩니다.

원래 터키는 1939년 10월 영국, 프랑스와 함께 삼각동맹을 체결한 친연합국 성향의 국가였지만 프랑스가 독일에 항복한 지 나흘만인 1940년 6월 26일 재빨리 중립을 선언합니다. 독일 역시 그리스,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대소련 전쟁에서 남쪽의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당시로서 상당한 양보인 터키 국경으로부터 20마일 이내에 군대를 접근시키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1941년 터키 대통령인 이노누(Inonu)에게 터키의 중립을 존중한다는 편지를 보내게 됩니다.

이 시점은 계기로 터키를 자국 편으로 삼으려는 추축국측과 연합국측의 노력이 본격적으로 시작됩니다. 1941년 6월 18일 독일-터키 상호 우호조약이 체결되고 미국의 경우 1941년 3월 31일 랜드-리스 법안(Lend-Lease Act)을 통해 영국, 그리스, 터키에 전략 물자를 지원하기 시작합니다.

북아프리카에서의 패배와 스탈린그라드에서의 참패를 계기로 연합국측은 이미 1943년부터 터키에게 집요하게 참전을 요구합니다. 하지만 터키는 오히려 독일의 전쟁 수행에 결정적인 전략물자인 크롬광석을 독일에게 지속적으로 판매함(1941년 10월 클로디우스 조약)으로써 연합국측으로 하여금 대응구매 (Preclusive Trade: 독일에 대한 크롬광석 판매를 중단시키기 위해 대량의 크롬광석을 터키로부터 사들이는 정책)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듭니다.

이 크롬광석의 수입은 독일의 전쟁수행에 결정적인 요소로서 (스테인레스 강과 각종 탱크, 잠수함, 전투기 제조에 필요한 특수강 제조에 쓰임) 독일의 군수상인 쉬피어(Speer)의 경우 크롬광석의 공급이 중단될 경우 10개월 내에 전쟁수행이 불가능해질 것이라고 히틀러에게 보고했을 정도입니다.

결국 1943년 4만5천톤, 1944년 9만톤의 크롬광석이 독일로 수출이 되는데 이를 저지하기 위해 영국과 미국은 42년부터 44년까지 크롬광석을 포함한 1억2천5백만불 어치의 물품을 터키로부터 구입하게 됩니다.

하지만 전쟁의 향방이 점차 연합국 측에 유리해지고 연합국 측의 압력도 따라서 증대함에 따라 터키는 1944년 4월 독일에 대한 크롬광석 수출을 중단하고 이어 8월에 모든 경제적 외교적 관계 역시 단절하게 됩니다.

비록 독일로의 수출과 연합국측의 대응구매(Preclusive Trade)가 중단됐지만 터키 경제의 급격한 악화를 우려한 미국과 영국의 재정적인 지원은 계속되었습니다.

터키의 외교적 노력은 마침내 1945년 3월 샌프란시스코 국제 연합 창설 회의에 승전국의 일원으로 초대됨으로써 그 결실을 봅니다. 이때 승전국의 규정은 1945년 3월 1일까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는 경우로 되어 있는데 터키의 대독 선전포고는 1945년 2월 23일이었습니다. 외교적 노력과 승리는 이런 경우를 놓고 말하는 듯합니다.

구체적인 이득이 담보되지 않는 한 과거의 외교적 관계에 연연하지 않고 실리를 챙긴 터키의 자주적 외교술이 돋보입니다.

III 결론

세계 역사상 자국의 이익을 등한시한 사대외교로 자국민과 자국의 이익을 지킨 나라는 아무 데도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의 경우 나라 전체가 쪽박을 차는 경우를 루마니아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자주외교는 우리의 안전과 번영을 위해서도 꼭 필요한 일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외교를 펼친다고 해서 전쟁가능성이 늘어나기는커녕 오히려 줄어들 겁니다.

제 글에 예로 든 4개국은 당시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나 주변의 강대국과 견주어 미약하기만 한 존재들이었습니다. 전 이렇게 생각합니다. 한 국가의 생존은 그 국가가 보유한 물리적 군사력과 경제력에만 의존하는 것은 아닙니다. 타국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가에 대한 성찰과 그에 따른 외교적 대응, 그리고 자신감과 자존감만이 한 민족과 국가의 안녕과 번영을 보장해 줍니다. 턱도 없는 자만심도 웃기는 얘기지만 터무니없이 자신을 비하하는 자세 역시 국제사회에서 자신을 죽이는 독약으로 작용합니다.

현재 북한을 선제적으로 공격하자는 미국 내의 신보수세력의 입장은 우리 민족의 입장과는 절대 공존할 수 없습니다. 지금 우리가 분명한 자주적 입장을 상대에게 당당히 표명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6.25 직후의 폐허 더미로 다시 돌아가야 할지도 모릅니다.

북한 역시 핵에 대한 집착이 한반도 내의 외세 개입의 빌미가 된다는 사실을 자각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자녀들이 두려움 없이 사는, 남북의 공존이 보장된 번영된 한반도가 될지 말지는 현재의 우리의 자세에 달려 있습니다.

핀란드의 경우 사회주의자들이 이념과 상관없이 조국이 위기에 처했을 때 주저 없이 전선으로 달려 나가는 등, 전 국민이 하나가 되었을 때 외세로부터 독립을 지킬 수 있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공부해 보았습니다.

현재 한반도를 중심으로 한 4대 강국의 이해득실을 따지는 외교적 한판 대결장 앞에 대통령을 나무 위에 올려놓고 흔들어대는 야당과 일부 보수 신문의 모습은 우려의 정도를 넘어서 민족의 이익에 위협요소가 되고 있습니다. 국익을 위한 전략적 사고를 가진 집단이 정치권의 주류가 되는 그 날을 꿈꿔 봅니다.




오마이 뉴스에서 퍼왓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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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류병삼 2004.11.24 23:00
    미국이 주창하는 팍스 아메리카. 전세계의 경찰국가 역할. 그로인한 이라크, 이란 등의 대 아랍국가 정책, 대북정책. 이러다가 유럽연합이 미국에 등을 돌리게 되면 어찌하려고. 세계대전이 예전의 이념대립과 독재정권에 대항한 전쟁이라면 지금은 자국의 이익을 챙기기 위한 전쟁으로 변화 된다면. 유럽연합이나 일본과 같이 독재적 경제정책에 휘돌릴 수 밖에 없는 나라들이 무력으로라도 벗어나고 싶어 한다면... 미국과 제3차 세계대전? 그런 상황이라면 우리나라는 어느편에서 고민할까? 미국을 편들어서 함께... 아님... 대세의 흐름에 따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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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이 2004.11.24 23:00
    좋은 기사네요. 역사에서 배울 것이 이런 거죠. 과거에 그들은 어떻게 했는가, 그래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마무리됐는가. 그것을 잘 보면 우리 현재 시대에서 무엇이 우리를 위한 길인지 선택할 수 있죠. 매우 판단하기 어려운 듯한 사회양상이 있지만, 똑바로 정신차리고 보면 무엇이 올바른지 알 수 있습니다. 잘 선택하는 건 모두의 몫이죠. 대통령 한 사람의 책임만이 아니죠. 정보화 사회에선 모두가 의사결정을 위한 영향력을 가지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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